죽다 살아난, 한 중소기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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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대기업에서 재무와 영업을 모두 거친, 나름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던 내가 이직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보다 ‘시간‘이었다.

돈은 내게 있어 그리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었다. 

돈이야 벌면 되지만 시간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24시간’만 주어지니까.

대리 때부터 파트장 역할을 했지만 과장으로 진급하면서부터 < 실무 + 관리자 > 레벨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되니 그야말로 회사 일로 정말 눈코 뜰새 없이 바빠지게 되었다.

일에 치여 살게 되니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팀에서 제일 빨리 출근해서 간밤에 쏟아진 미국 고객으로부터의 메일 체크 및 고객 동향 보고부터 시작해서 주문 입력 및 매출 마감까지..

매일 숨막히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난 무엇보다 워라밸을 추구하는 사람 (나중에 물어보니 회사 사람들은 내가 이런 스타일인지 몰랐고 회사를 그만둘 줄은 더더욱 몰랐다고 하네.. 회사에 뼈를 묻을 줄 알았다고^^;;)이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지쳐갔고 건강 또한 악화되어 갔다.

결국 휴직을 2개월 가량 했지만 회사에 대한 애정이 되살아나진 않았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정든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진 중소기업으로의 이직.

처음엔 적응이 안됐다.

근무지도 그렇고 주변 환경, 복지 등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이러한 사항들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으니 이내 수긍했지만 무엇보다도 10년간 대기업 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들어간 ‘어깨 힘’을 빼는 게 제일 어려웠다.

그동안 대기업 밥 먹었다고 많이 건방져지고 기고만장해졌다는 걸 이 때 실감하게 됨.

어쨌든, Pay는 작아졌지만 대기업 출신 & 사장님과의 약속 때문에 내 책임과 권한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커졌다. 

회사가 안 좋아지는 국면으로 가고 있었던 상황에 난 이른바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등판한 격이었기 때문.

갑인 ‘H’ 대기업의 끝없는 CR 요구, 회사 내 불명확한 R/R, 고객과의 의사소통 모호, 그 과정 속에서 발견된, 약속을 저버리는 행태까지..

난 그동안 계속 ‘H’ 대기업의 이해할 수 없는 업무 스타일 (PO 및 FCST 불분명, 재고 운영 주체 및 결재, 물량 배분 문제 등등) 을 꼬집으면서 사실상 ‘사업 정리’라 불가피하다고 수차례 보고드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연히 사장님을 비롯한 임원들과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악화….

내가 다니고 있는 현 회사는 원래 금속 관련이 본업인데 사업 확장 차, 회사 하나를 인수 / 합병하게 되면서 외형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 케이스.

그런데 이 피인수 회사가 결국 엄청난 부실덩어리였음.

겉으로만 대기업 1차 벤더이지, 속으로는 완전히 망가진…

그러던 중, 재경 쪽에서 이상한 흐름(?)이 발견되었다.

실제 현금 흐름과 결산 자료 상의 숫자가 불일치하더라는..

난 관련 자료를 넘겨 받아 분석을 하기 시작했고 내부에서 작성한 제품별 손익 자료까지 뒤지게 되었다.

그랬더니 말도 안되는 데이터가 도출되기에 이른다.

분명히 자료 상에는 1~5% 가량 영업이익이 난다고 되어 있는데 내가 계산한 바로는 이익은 커녕 제품 별로 적자가 10~20%까지 발생하네.. 이게 뭐지?

결국 난 엑셀 수식까지 뒤지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로직이 발견된다.

상식적으로 제조업의 한 제품 (재공품 포함, 상품 X)은,

각 부품 별 원가 + 직/간접 노무비 + 판매관리비 + 업체 마진 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엑셀 상 로직에는 직접노무비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인정하고 있었고 업체 마진 또한 판가에 일정 퍼센테이지를 곱하는 게 아닌, 판관비에 일정 %를 곱하는 아주아주 잘못된 로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게 어찌된 영문이냐고 해당 업무 담당 임원한테 물어봤더니 하는 말이,

“그게 H 대기업에서 내려온 방침이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었습니다.”

“뭐라고요?”

난 할 말을 잃었다…

잘못된 관행인데 그걸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갑이 시키는 그대로 그렇게?

간단히 말하면 그 해당 임원은 지금껏 사장에게 허위 보고를 한 셈이다.

난 자료가 왜 잘못 되었는지를 모든 임원들을 앉혀놓고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이를 계기로 회사의 모든 의사 결정은 나를 거쳐가게끔 프로세스를 손질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물량을 주고 업체 별로 배분하는 갑의 의중 및 앞으로의 향배가 핵심 키포인트였다.

우리 회사 말고도 2군데의 협력사가 더 있었는데 이 글에서 전부 다 얘기할 순 없지만 이상한 조짐들이 catch되기 시작했다.

나름 영업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이러한 조각들을 모아 다시 한 번 강력히 Biz 정리가 불가피함을 보고했다.

사장님 입장에선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이해는 됐다.

대기업 1차 벤더의 기회는 생각보다 쉽게 오는 게 아닐테고 엄청나게 급성장한 매출은 그야말로 달콤한 유혹이지..

하지만 이제는 실리, 아니 생존을 걱정해야 할 때라 판단했다. 

난 사장님께 마지막으로 보고를 드렸다.

“제가 그들에게 몇 가지 포인트를 근거로 메일을 보내겠습니다. 이 안을 받아들여진다면 저 또한 이 Biz를 계속 이어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안을 H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를 진정한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우리 회사 또한 무너지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예측한 대로 그 대기업은 우리 제안에 대꾸하지도 않았고 우려했던 사항들이 하나둘씩 현실화되자 결국 사장님은 내 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Biz 중단도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내가 납품을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 두지 못하는 게 대기업과의 관계다. 

그들과의 거래를 위해선 당연히 엄청난 분량의 공급 계약서 및 부대 사항들이 포함되게 마련인데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문구 안에 들어가 있는 독소조항들을 챙겨볼 여력이 없다. 관련 clause들을 검토해볼만한 조직 및 인력, 시간이 없을 뿐더러 대기업과의 납품에 목을 맨 기업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검토해보지도 않고 사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 또한 당연히 그런 상황이었고 원만한 합의를 이루려했으나 양 사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고 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딸려오게끔 하기 위해 이런 저런 작전을 짠 후 H와 담판을 지었다.

말이 담판이지, 그들 본사에 쳐들어가서 각 부서별 팀장과 엄청나게 싸웠음..

그 세부 디테일 및 협의 과정은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이 모든 일은 오로지 전부 다 나의 몫이었고 때론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마무리되었다.

당연히 이 과정 속에서 그 대기업과의 Biz는 정리 및 장비 매각으로 이어졌고 이쪽 사업부에 종사했던 거의 대부분의 직원들은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전보다는 작지만 더 내실 있는 회사로 나아가기 위한 일보 후퇴라고 하면 너무 상투적이고 뻔한 표현인가..

예전에는 대마불사였다.

하지만 대기업도 훅훅 나가떨어지는 극심한 불경기 속에 중소기업은 버틸 체력 (Money)이 없다.

조그마한 환부 도려내기 아까워하다가 회사 전체가 날라갈 수 있음을 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난 칼을 빼들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회사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계 사업을 정리했기 때문에 당장 회사의 외형, 즉 매출 감소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게 최우선인 상황이다. 외형 따지다가 골로 간 케이스를 난 직, 간접적으로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대신, 기존 아이템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고정비도 훨씬 적게 들어가면서 원가 부담도 별로 없는 신사업 또한 한 두 개 찾아서 사장님께 보고를 앞둔 상황이다.

다만 조급하게 시작하진 않으려 한다.

신중하게 step by step 으로 접근하려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gards,

Brandon